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노선도 바깥, 기차역에서 만난 느린 시간들

by 예두리 2025. 6. 26.

여행은 늘 목적지로 향하지만, 가끔은 도중에 멈춰 선 그곳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오늘은 노선도에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기차역들에 대해 설명해 드릴 예정입니다.

노선도 바깥, 기차역에서 만난 느린 시간들
노선도 바깥, 기차역에서 만난 느린 시간들

서울역에는 없는 풍경, ‘양원역’이라는 이름의 쉼표

기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선도보다 차창 밖을 더 신뢰한다.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무 계획 없이 무궁화호를 탔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노선도 끝자락에 있는 ‘양원역’에서 내렸다.

양원역은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경춘선 작은 간이역이다.
플랫폼은 단 하나, 엘리베이터도 없고, 역사 건물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소박한 곳.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하늘과 양원역의 어울림은 묘하게 완벽했다.
마치 도시의 시간과는 다른 ‘느리게 흐르는 세계’에 들어선 느낌.

플랫폼 옆으로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고,
기차가 떠난 후에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선로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이 역을 ‘중간 기착지’라 말하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목적지 이상이었다.
이곳에는 관광지도, 유명 맛집도 없지만,
시간이 비어 있고, 그 빈틈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일본 홋카이도, ‘하마나카역’에서 만난 무인(無人)의 따뜻함

일본 기차 여행의 백미는 신칸센이 아니다.
오히려 시골 역에서 멈춘 무인역의 정적이, 그 나라를 더 깊게 느끼게 만든다.
홋카이도 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하마나카역.
이곳은 1일 승하차 인원이 30명을 넘지 않는 ‘무인역’이다.
역무원도 없고, 개찰구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하마나카역 대합실에는 낡은 벤치가 있고,
그 위에는 누군가 놓고 간 수첩과 연필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행자들이 남긴 손글씨 메모가 가득했다.
“이곳에서 첫눈을 봤습니다.”
“엄마와 처음 기차를 타던 날이 생각나요.”
“다시 와도 좋겠다고, 지금 생각했어요.”

나는 그 수첩에 짧게 적었다.
“이 조용한 역이, 오늘의 내 여행 전부였습니다.”

기차가 도착하면, 기관사가 직접 문을 열고 닫는다.
승객은 둘, 셋. 어떤 날은 아무도 없을지도.
그런데 그 조용한 반복이 무척 따뜻했다.
무인역이라 ‘사람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스며드는’ 곳이었다.

이름 모를 역에서, 잠깐 멈춰 서는 여행

한국 강원도의 태백선이나 경북 봉화 지역을 달리는 무궁화호 비주류 노선들은
대부분 ‘내리기엔 애매한’ 역들을 지난다.
하지만 나는 그 애매함이 좋았다.
정확한 목적지 없이, 기차 안에서 역 이름을 보며 즉흥적으로 내리는 여행.

그날은 삼곡역에서 내렸다.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역, 평일 하루 열차가 몇 번밖에 서지 않는 그곳.
역사엔 아무도 없었고, 개찰구 대신 철제 난간 하나가 끝이었다.
플랫폼 바깥으로 걸어 나오자, 작은 시냇물과 이름 모를 돌담길이 이어졌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풍경,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은 ‘내 여행만의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

근처 마을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며 주인에게 말했다.
“이 근처 뭐 볼 게 있을까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딱히 없지만... 천천히 걷다 보면 뭐든 보일걸요.”

그 말이 여행의 본질처럼 느껴졌다.
관광지를 정복하려는 게 아니라, 길 위에서 ‘머무는 능력’을 기르는 일.
노선도 바깥의 역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기차역은 멈춤의 예술>
여행은 반드시 빠르고 효율적일 필요가 없다.
가장 느리고, 가장 낡은 철길 위에서 오히려 가장 선명한 기억이 쌓이기도 한다.
노선도에서 벗어난 역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곳엔 사람도 있고, 하늘도 있고, 기다림이 있다.

기차가 멈춰 서는 그 짧은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서 잠시 내려 쉴 수 있다.

다음엔 지도를 펼치지 말고,
그저 철도 시간표 한 장만 들고 떠나보는 건 어떨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름 없는 기차역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