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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말고 느껴보는 시장 여행 - 이야기로 가득한 사람들의 거리

by 예두리 2025. 6. 25.

여행지에서 시장은 언제나 가장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곳엔 물건보다 더 많은 이야기, 음식보다 더 진한 사람 냄새가 깃들어 있다.
오늘은 '먹지 않고', 대신 느끼고 듣는 시장 여행에 대해 설명해 드릴 예정입니다.

먹지 말고 느껴보는 시장 여행 - 이야기로 가득한 사람들의 거리
먹지 말고 느껴보는 시장 여행 - 이야기로 가득한 사람들의 거리
 
하루가 시작되는 곳, 서울 노량진 새벽 수산시장에서
 

이른 새벽 4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서울 노량진. 지하철 첫차도 아직 움직이지 않을 시간이지만, 이곳은 이미 하루가 시작된 지 한참이다. 수산시장은 언제나 새벽이 가장 뜨겁다.
바닥은 미끄럽고, 공기엔 짠내와 생선 비린내가 엉켜 있다. 하지만 그 냄새마저도 익숙해지면 어느새 이 시장의 체온이 느껴진다.

어디선가 “광어 세 마리에 ○○○원!” 하는 외침이 들려온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상인이 먼저 말을 건다.
“어이, 젊은 친구. 구경만 해도 돼. 오늘은 날씨가 도와줘서 광어가 아주 실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곳의 상인들은 영업보다 대화가 먼저다. 무엇을 사지 않아도 그들은 묻고, 웃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아주머니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여기서만 27년째야. 남편이랑 둘이 시작했는데, 이젠 손자도 다 컸지. 요즘은 젊은 사람들 얼굴 보는 게 반가워. 시장이 조금씩 조용해지거든.”
그 목소리에는 쓸쓸함보다는 어딘가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한때 한국의 수산 유통을 이끌던 중심지였던 노량진. 그 명성은 흐려졌을지 몰라도, 이곳에 살아 숨 쉬는 이야기는 여전히 진하다.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대신 마음속에는 비린내보다 강한 사람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낡고 오래된 시간 속을 걷다, 파리 생투앙 골동품 시장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인 생투앙 골동품 시장(Marché aux Puces de Saint-Ouen)은 단순한 ‘벼룩시장’ 그 이상이다. 이곳은 마치 도시의 오래된 기억이 한데 모여 있는 박물관 같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조용히 걸어 다니다 보면 구석구석에 사람이 살고, 시간이 머문 흔적이 있다.

나는 우연히 작은 골동품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진열된 건 오래된 손목시계와 흑백 사진들, 그리고 닳아 빠진 지도 몇 장. 가게 주인인 중년 남자는 내게 다가와,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1940년대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에서 발견된 거야. 누군가의 여행일지였지.”
나는 흠칫 놀랐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오래된 물건 하나에, 누군가의 인생이 담겨 있다는 생각에.

그는 손에 낀 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이 시장에서 제일 귀한 건 ‘가격’이 아니라 ‘기억’이야. 어떤 물건은 그저 낡은 것이고, 어떤 건 수십 년 동안 누군가의 손에 있었던 이야기지.”

나는 그 가게를 나서며,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대신, 한 장의 오래된 엽서 사진을 기억 속에 담았다. ‘기억을 파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이 시장의 진짜 주인이었다.

천과 향신료 사이의 대화, 마라케시 거리 시장

모로코의 마라케시(Marrakech)는 오감이 폭발하는 도시다. 그중에서도 마라케시의 거리 시장, 즉 수크(Souk)는 그 도시의 심장처럼 뛰고 있다. 눈을 감고 걸으면 코끝을 간질이는 건 향신료 냄새고, 귀를 간질이는 건 상인들의 쉼 없는 목소리다.
“허브 필요해? 민트? 코리앤더?”
“이 카펫은 베르베르족이 직접 짠 거야. 손으로, 하루에 5cm씩만 짜!”

나는 작은 천막 아래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에는 색색의 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그는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 무늬는 우리 부족의 이야기야. 너도 이야기를 원하니? 아니면 단순한 기념품?”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물건을 살 때, 물건만 보지만, 그 너머엔 언제나 사람의 손과 삶이 있다는 것을.

그와 차를 나누며 그는 손주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한국의 겨울 시장 풍경을 설명해줬다. 언어는 달랐지만, 대화는 흘렀다. 우리는 ‘물건’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훨씬 소중한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이야기’였다.

 

먹지 않고도 배부른 시장 여행
이번 여행에서 나는 시장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시장은 먹을 것을 사고파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삶이 가장 가까이 드러나는 무대이기도 하다.
지갑이 아니라 마음을 열면, 시장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 다음에 시장을 방문한다면, 먹기 전에 한 걸음 멈춰 보길.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질문 하나면, 시장은 당신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