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가위질 너머, 그 장면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오늘은 조명 밖의 공간 '영화 미공개 촬영지'
탐방기에 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영화가 숨긴 장소들 – 우리가 놓친 또 다른 주인공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풍경을 따라 여행을 떠난다.
《리틀 포레스트》의 전북 완주, 《건축학개론》의 서귀포 집, 《기생충》의 자하문 터널 계단.
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보면, 관객에게 보여지지 않은 공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장면은 촬영됐지만 잘려나갔거나, 배경으로만 스쳐 지나간 장소들이다.
바로 그곳들이 내가 찾고자 한 곳이었다.
이 여행의 시작은 영화 《밀정》에서 비롯됐다.
친구와 함께 다시 보던 중, 편집상 빠졌던 어떤 장면이 유출본을 통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장소가 실제로 인천 배다리 철교라는 걸 알게 됐다.
그곳은 원래 '독립운동가가 탈출하며 폭파되는 철교 장면'의 무대였지만, 최종 편집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철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그 풍경은 시간 속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런 장소들은 마치 ‘감춰진 성지’ 같다.
영화 팬들에게는 감성 충만한 보물찾기이고, 여행자들에게는 SNS에 없는 새로운 발견이다.
로케이션 헌팅을 했던 제작진의 고뇌가 녹아든 공간. 그리고 화면에 담기지 못했지만, 분명히 ‘영화를 만든 일부’였던 공간.
그 흔적들을 따라가며, 나는 스크린 너머의 세계로 들어갔다.
지도에 없는 로케이션 – 세 편의 영화, 세 개의 장소
1) 《옥자》 – 비공개 촬영지: 강원도 영월 창터리 폐목장
《옥자》의 주요 장면은 서울 도심, 외국, 축산장 등 다양한 공간이지만, 실제로 초반부의 시골 풍경은 대부분 강원도 영월 창터리에서 촬영되었다.
이곳은 영화 초반, 미자의 일상 공간이자 옥자와 함께 뛰놀던 푸른 목초지로 설정되었지만, CG와 다른 로케이션 컷이 섞이면서 대부분 실제 장면이 삭제되었다.
현지 사람들도 “여기서 영화 찍은 거 맞냐?”며 반신반의할 정도.
그러나 주변에는 당시 영화 팀이 임시 설치한 울타리 흔적이 남아 있었고, 마을 이장은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기 돼지처럼 생긴 걸 데리고 몇 날 며칠을 찍더라고. CG라고 해서 깜짝 놀랐지.”
GPS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이 마을은, 영화의 순수한 정서를 오롯이 담고 있었지만, 흥행과 상업성 때문에 스크린에는 거의 등장하지 못했다.
그곳에 서서 바람결에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그 장면이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2) 《버닝》 – 편집된 장면의 배경: 경기도 광주의 ‘낙은재’ 폐가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는 원래 '종수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씬'이 존재했다.
그 배경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폐가 ‘낙은재’.
이 장소는 극 중에서도 잠깐의 복선으로 남았지만, 본편에서는 빠졌고, 오직 시나리오와 스틸컷 일부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을 찾기 위해 나는 로케이션 매니저들이 남긴 블로그 포스트, 팬들의 기록, 영화 미술팀의 인터뷰 등을 크로스 체크했다.
그리고 결국 좁은 오솔길 끝자락에서, 낙엽에 가려진 폐가를 발견했다.
시간이 멈춘 그 집은, 영화처럼 고요하고 기이했다.
문이 떨어져 나간 창틀 사이로는 먼지가 흩날리고, 낙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과거이자, 한 감독의 미장센이었던 그 공간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채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도 찍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그 안에 서 있었다.
어쩌면, 그 장면이 스크린에 담기지 않았기에 더 기억에 남는 걸지도 모른다.
3) 《스틸 플라워》 – 바닷가 장면: 부산 암남공원 절벽 아래독립영화 《스틸 플라워》에서 주인공이 절벽 끝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후 편집된 두 번째 바닷가 장면이 존재했는데, 바로 부산 암남공원 절벽 아래였다.
이곳은 절벽과 바위 틈이 많아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라, 결국 영화에서는 안전 문제로 제외되었다.
그러나 촬영은 분명 진행됐고, 그 흔적이 일부 촬영 스틸컷에서 확인된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작은 갈림길로 내려가면, 헬멧을 쓰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위험한 구간이 나온다.
거기서 만난 어르신 한 분이 말했다.
“영화 찍으러 왔던 애들, 고생 많이 했어. 며칠을 저 바위 아래서 텐트 치고 있었거든.”
비록 스크린에서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땀과 시간은 바위 틈 사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직접 서 본 내가 기억한 건, 카메라가 없을 때의 풍경이었다.
영화는 끝났지만, 장소는 남는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영화는 종이 위의 판타지라고.
하지만 그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건 결국 ‘진짜 공간’이다.
수많은 시간과 사람들, 지역 주민의 협조,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세트와 장면들.
그 모든 게 모여 ‘한 컷’을 만든다.
그리고 그 컷이 빠졌다고 해서, 장소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진짜 영화 팬이라면, ‘보여진 장면’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장면’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여정은 단순한 성지순례가 아닌, 감독과 제작진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이었다.
어쩌면 편집된 그 장면은, 관객의 눈엔 없었지만 영화의 혼을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난다.
스크린에 없었던 그 장소를 찾아.
누군가가 지나간 그 자리를, 다시 한 번 느껴보기 위해.
<참고 정보 및 팁>
-영화 관련 스틸컷, 시나리오, 로케이션 정보는 ‘KOBIS’, ‘네이버 영화 스틸’, ‘촬영감독/미술감독 인터뷰’ 등에서 수집 가능
-팬 커뮤니티와 인디포럼 등에서도 편집 장면 정보 공유됨
-비공식 장소 방문 시 지역 주민과의 소통, 안전 확보 필수
-SNS나 지도에 나오지 않는 장소일수록 마니아층의 흥미를 자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