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선 하나가, 어떤 이들에겐 삶을 가르고, 또 어떤 이들에겐 일상이 된다.
국경 근처에 산다는 것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정체성 사이에서 매일 균형을 잡는 일이다.
오늘은 국경선 근처 마을에 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한 골목, 두 나라 - 프랑스와 독일의 회색지대 마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기차로 20분 남짓 달리면 도착하는 작은 마을, 킬(Kehl)은 지리상 독일이지만, 분위기는 프랑스적이고 언어는 반반이다.
이곳은 국경을 기준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마주보는 도시 중 하나로, 국경선이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른다.
놀라운 건, 이 국경은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 셍겐조약 덕분에 킬과 스트라스부르 사이를 오가는 데 여권도 필요 없다.
하지만 현지에선 “프랑스 쪽에서 사는 독일인”, “독일어를 못 하는 프랑스 상점 직원” 같은 묘한 풍경이 일상이다.
나는 킬 쪽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고,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Bonjour”로 인사를 시작해 “Danke schön”으로 대화를 끝맺는 걸 들었다.
커피잔 하나, 대화 한 마디에 두 나라의 문화가 섞이고 흘렀다.
현지 주민 중 한 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린 국경을 의식하지 않아요. 오히려 ‘경계가 흐려진 삶’에 익숙해져 있어요.”
하지만 또 다른 이는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놨다.
“그래도 완전히 섞이지는 않아요. 말투 하나, 계산 방식 하나에도 미묘한 긴장이 있어요. 우리는 매일 경계에서 타협하며 사는 거예요.”
이곳은 단순한 ‘문화의 융합’이 아니라,
경계를 중심으로 생긴 감정과 태도의 교차점이었다.
국경이 끊어놓은 마을,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노갈레스(Nogales)와 멕시코 소노라주 노갈레스는 사실상 하나의 마을이 두 나라로 나뉜 케이스다.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이어져 있던 지역이 국경선 하나로 갈라진 이 도시는,
지금도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단적으로 다른 삶이 존재한다.
나는 미국 쪽 노갈레스에서 멕시코 쪽을 바라봤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같았다. 같은 하늘, 같은 나무, 같은 언덕.
하지만 걸어서 국경을 건너 몇 발자국 들어가면,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다.
도로는 정비가 덜 되었고, 상점들은 훨씬 작았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 더 거칠었다.
멕시코 쪽 주민 한 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땐 이 철조망 없었어요. 시장도 함께 보고, 축제도 같이 했죠. 이젠 만나려면 비자 신청부터 해야 해요.”
그의 표정에는 국경이 갈라놓은 건 땅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더 씁쓸한 건,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이 국경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산가족처럼 살아가는 현실이었다.
“제 사촌은 미국 시민권자라 매주 방문하죠. 전 못 가요. 서류가 없어요.”
국경은 그저 선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자유의 끝이었고, 누군가에겐 제한의 시작이었다.
국경의 긴장과 공존, DMZ 주변의 묘한 평화
한국의 비무장지대, 즉 DMZ(De-Militarized Zone)는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국경선 중 하나다.
한 나라가 둘로 갈라져, 총구를 마주한 상태로 반세기를 넘게 살고 있는 이 공간은
단순한 ‘분단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태·인간·군사 지대다.
나는 강원도 철원 인근에 머물며 DMZ 생태관광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기차는 더 이상 가지 않는 곳, 길이 막혀버린 도로, 그 너머엔 민간인이 살지 않는 초록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자연이 되살아났고, 멸종위기 두루미와 고라니들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하지만 불과 몇 백 미터 너머에는 총을 든 병사들이 서로를 감시하며 서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안내인은 말했다.
“여긴 평화로워 보이지만, 언제든 전선이 될 수 있는 곳이에요. 아이러니하죠? 사람은 못 들어가는데, 새는 자유롭게 넘나들어요.”
나는 망원경으로 북측 초소를 바라봤다.
누군가 거기에도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말은 없고, 소통은 없지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이웃’이 거기 있었다.
<국경이 말해주는 것은, 분리이자 연결>
우리는 지도를 펼쳐 ‘여기까지는 이 나라’, ‘저기부터는 다른 나라’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국경을 마주한 사람들의 삶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국경은 정치가 긋는 선이지만, 문화는 그 선 위를 흐른다.
어떤 국경은 통과가 자유롭고, 어떤 국경은 목숨을 건다.
어떤 곳에서는 말이 섞이고, 어떤 곳에서는 언어조차 차단된다.
하지만 그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여행은 그 경계를 ‘넘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그 경계 주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